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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정호가 [ 대동여지도 ] 를 만들기 위해 의존했던 방법은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두루 모아 집대성하는 것이었다 . 기록들에서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고 , 여러 지도를 대조하고 지리지들을 참고했다는 내용뿐이다 . [ 조선어독본 ] 에서는 김정호 이전의 지도들은 그 내용이 부정확하고 형편없었다고 하나 사실 조선은 지 도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. 1931 년 정인보 가 [ 대동여지도 ] 에 대한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, 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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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정호가 [대동여지도]를 만들기 위해 의존했던 방법은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두루 모아 집대성하는 것이었다. 기록들에서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고, 여러 지도를 대조하고 지리지들을 참고했다는 내용뿐이다. • [조선어독본]에서는 김정호 이전의 지도들은 그 내용이 부정확하고 형편없었다고 하나 사실 조선은 지 도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. 1931년 정인보가 [대동여지도]에 대한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, 이 때 정인보는 조선 지도학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나흥유, 양성지, 윤영, 정상기, 홍대용, 신경준 등의 인물을 거론하며, 그 발달선 상에 [대동여지도]를 두었다. 김정호는 이들의 성과를 집대성해 우수한 완성품을 만들어낸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. • 신분이 낮았던 김정호가 지리학의 고급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. 우선 최한기와 신헌 등 그의 지도 제작에 도움을 준 후원자의 덕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. 최한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정호의 벗을 자처했던 인물로, 지도와 지리에 관심이 많아 [지구전요]라는 세계 지리책을 쓰고 김정호와 함께 [지구전후도]라는 세계지도를 만들기도 했다. 대동여지도가만들어지기까지…
김정호의생김새와대동여지도의모습입니다.(약1861년도에만들어짐.)김정호의생김새와대동여지도의모습입니다.(약1861년도에만들어짐.)
김정호(지리학자) 누구인가? • 출생 1804년(황해도 토산)/사망 1866년(남대문 밖 약현) • 김정호(金正浩, 1804년? ~ 1866년?[1])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였다. 자는 백원(伯元)·백원(百源)·백온(伯溫)·백지(伯之)이며, 호는 고산자(古山子)[2]이다. 황해도 토산(兎山) 출생이며, 본관은 청도(淸道)이다. • (1) 생애 •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[4] 무렵에 태어났다.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신분은 한미했다.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(殘班)이나 중인이었으리라 추측한다.[5] •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,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.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(大人) 증언을 근거로 한다.[6] 반면 동아일보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(遺墟, 옛 집터)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.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. 아무튼 만리재·약현·(남대문 밖)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. • 동관(童冠)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[7]고 최한기가 쓴 〈청구도〉 제문(題文)에 나타나 있다. ‘동관’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. • 1834년(순조 34년)에 지지 《동여도지》를 제1차 편찬하였고,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〈청구도〉도 펴내었다. 그 뒤 1851년(철종 2년) 무렵에 지지 《여도비지》를 편찬하였고, 1856년(철종 7년) 무렵에는 지도 〈동여도〉를 편찬하였다. • 1861년(철종 12년)에는 앞서 만든 〈청구도〉와 〈동여도〉를 보완하여 〈대동여지도〉를 편찬한 뒤 1866년(고종 3년)까지 《대동지지》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죽었다. 김정호의 생애